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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대 화엄사

망마산 2010. 2. 1. 21:04

지리산 대 화엄사

 

2010년 2월 1일 월요일

“지금으로부터 132여년전 백제국 구차례(求次禮: 현재 구례)라는 곳 두류산(지리산)에서 범승(梵僧)이신 연기존자께서 화엄경을 설했다고 합니다 두류산이 문수보살의 상주설법처(常住說法處)라해서 지리산이요, 화엄경을 설했다고하여 화엄사라고 합니다 화엄사는 백두산의 혈맥과 섬진강의 태극이 합류하여 무한한 힘이 솟는 곳이지요 고구려는 백두산의 힘 백제는 백두산의 혈맥으로 강대한 힘을 얻었고 신라국은 혈맥이 없어 힘을 발휘할 수 없었지요 그래도 한가닥 희망을 갖고 화랑들은 지리산 세속평정에서 무예를 닦으며 그 곳을 차지하기 위해 노력한 끝에 백제 무왕때 우리가 그 곳을 차지했지요 화랑도에게 무한한 힘을 얻을 수 있게 되어 용맹스러움이 서라벌까지 전해지고, 이 소승도 화랑도 출신이라 화랑도에게 삼국통일의 염원을 심어주기 위하여 화엄사에 가 보았지요 그 곳이 중국적인 화엄사상이 아니라 불타의 나라 천축에서 온 화엄의 도량인 것을 알고 감회가 깊었지요 이국땅 백제국에서 화엄의 꽃이 피워 있을 줄이야. 등잔밑이 어둡구나 의상스님은 지척에 천축적 화엄사상을 두고 위험을 무릎쓰고 멀리서 중국적 화엄사상을 배우고 있었다니 말입니다 “소승은 화엄사에서 화엄경의 이치를 통달하고 연기조사, 자장법사께서 거주(居住)하시던 해회당(海會堂)에서 화랑도에게 화엄사상을 설하며, 천차만별의 강물이 바다로 모이면 이름과 차별이 없어지고 하나가 되어 원융무애 하듯 삼국이 어디에 있는가 한민족이 아닌가 이렇듯 화암사상은 화랑도에게 원융무애한 힘을 줌으로써 삼국통일을 이를 수 있는 기반이 되었지만 정신적으로 완전한 통일을 이루지 못한 것은 아쉬움이 있지요 ”의상스님은 놀라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칭 화엄학의 시조요 부석사를 화엄의 근본도량으로 삼았다는 사실에 대하여 부끄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중국적인 화엄사상을 갖고 근본도량을 삼을 수 없다하여 문무왕 17년(677년)에 지리산화엄사에 오셨다 “이곳이 바로 범승이신 연기존자께서 화엄의 꽃을 피었던 곳이니 부처님의 성지에 온 느낌이구나 여기야말로 해동의 연화장세계로구나 삼국인이 한 민족임을 실현하는 정신적 통일을 이루게 하며, 또 화엄사가 해동의 근본도량임을 입증하기 위하여 화엄석경의 거대한 법당을 세우므로써 중생계를 연화장세계로 꽃피우게 위하여, 부처님의 화엄힘을 빌어 백두산의 혈맥 아래에 장육전(丈六殿) 법당을 건립하여야겠구나 ” 장육이란 부처님의 몸(16자)을 일컬으며 장육금신(丈六金身)이라 한다 2층4면7칸의 사방벽에 화엄경을 돌에 새기고, 황금장육불상(黃金丈六佛像)을 모셨다고 합니다 이 화엄경은 팔십화엄(八十華嚴)으로 10조9만5천48자로 되어 있으며 옥돌에 새겨진 화엄경은 부처님의 화엄사상을 꽃피웠고, 지금도 그 석경(石經) 조각들이 남아 있어 그 당시 연화장세게의 화려한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또 의상조사께서 전국에 화엄십찰(華嚴十刹)을 두어 화엄사상 선양에 전신의 노력을 기우렸다 화엄십찰는 지리산화엄사(智利山華嚴寺), 태백산부석사(太白山浮石寺) 원주 비마라사(原州毘麻羅寺), 가야산해인사(伽倻山海印寺), 비슬산옥천사(毘瑟山玉泉寺), 금정산범어사(金井山梵魚寺, 팔공산미리사(八公山美理寺), 계룡산갑사(鷄龍山岬寺), 웅주 가야협보원사(熊州 伽倻峽普願寺) 삼각산청담사(三角山淸潭寺) 등이다 인도(印度)적 화엄사상은 연기존자께서 씨를 뿌려 백제 승려와 백제국에 화엄의 꽃을 피웠고, 또 다시 신라 자장법사에서 원효성사로 이어 의상조사로부터 화엄의 종풍(宗風)이 해동에 가득하여 연화장세계를 이루었다

백제시대

백제 성왕 22년(544)에 인도 스님이신 연기조사께서 대웅상적광전과 해회당을 짓고 화엄사를 창건 후, 백제법왕(599)때 3천여 명의 스님들이 계시면서 화엄사상을 백제 땅에 꽃피웠습니다

신라시대

신라시대는 신라 선덕여왕 14년(645)에 자장율사가 부처님 진신사리73과를 모시고 4사자 3층 사리석탑과 공양탑을 세우셨습니다 원효성사는 해회당에서 화랑도들에게 화엄사상을 가르쳐 삼국통일을 이루었습니다 또 문무왕 17년(677)에 의상조사는 2층 4면 7칸의 사상벽에 화엄경을 돌에 새기고 황금장육불상을 모신 장육전 법당(지금의 각황전)과 석등을 조성하였습니다

경덕왕(742~764)때 이르러 8원 81암자로 화엄불국 연화장세계의 면모를 갖추고, 신라말기 헌강왕(875)때 도선국사는 동오층석탑과 서오층석탑 조성과 더불어 화엄사 중흥조가 되시면서 화엄사가 대총림으로 승격되었습니다

고려시대

고려시대는 고려 태조 26년(943)에 왕명으로 고려 최초로 화엄사를 중수하였고, 홍경선사가 퇴락한 당우와 암자를 중수하였습니다 문종(1047~1083)때 대각국사 의천에 의하여 중수, 인종(1126~1146)때 정인왕사가 중수, 명종 2년(1172)에 도선국사비 건립, 충렬왕(1236~1308)때 원소암 중건, 충숙왕(1313~1330)때 조형왕사에 의한 전면적인 보수를 하였습니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세종 6년(1426)에 선종대본산으로 승격된 화엄사는 배불의 와중에도 설응, 숭인, 부휴, 중관, 무렴 등의 고승대덕들에 의해 법석의 요람을 이루었습니다 임진왜란(1592~1598)때는 호남의 관문 구례 석주관에서 승병 300여 명을 조직하여 왜군에 맞서 싸웠으나 이 앙갚음으로 왜장 가등청정은 화엄사를 전소시키기에 이릅니다 인조(1630~1636)때 벽암선사와 문도들이 대웅전 등 몇몇 건물을 중건하고, 숙종(1699~1703)때 계파선사와 문도에 의하여 장육전 자리에 현존하는 목조건물로는 국내 최대규모로 웅장한 각황전 건립과 더불어 선교 양종대가람이 되었고, 근세에 이르러 도광대종사의 전면적인 중수에 힘입어 지금의 화엄사로 중흥할 수 있었습니다

 

 

 

 

 

 

 

 

 

 

 

 

 

 

 

 

 

 

 

 

 

 

 

 

 

 

 

 

 

 

 

 

 

 

 

 

 

 

 

 

 

 

 

 

그 유명한 홍매화 나무 올봄에는 자태를 자랑하겠지요 

 

 

 

 

 

 

 

 

 

 

 

 

 

 

 

 

 

 

 

 

 보수중인 범종각

12시 정각에 울리는 범종 

 

 만월당